역사 이야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

에 스더 2014. 7. 25. 12:00

16세기가 시작되는 1501년 조선에서는 두 명의 대학자가 탄생하였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이다.

두 학자는 성리학을 각자의 개성에 맞게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필요한 경우 왕에게 정치와 학문의 요체를 설명하는가 하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 김성일은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이 한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을 처음으로 강명하면서 인심을

순환시키고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면서 영남지역 의병 봉기를 독려하였다.

퇴계 이황은 (1501~1570)조선의 국시로 이념화된 성리학의 탐구에 전념하여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학자였다.

이황은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식(植)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경호(景浩), 본관은 진보(眞寶)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인 춘천 박씨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황은 숙부인 이우(李偶)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12세 되던 해 아우로부터<논어>

를 배우기도 했다.

이황의 일생은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 34세부터 49세까지의 관직 진출기,

50세부터 71세까지 은퇴 후 후진 양성기로 나눌 수 있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4년 34세에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박사, 전적, 지평 등의 벼슬을 거쳐 1543년 종3품의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동료 학지들이 크게 희생당하자 고향인 예안의

토계로 낙향하였다.

잘 알려진 퇴계라는 호는 낙향하여 살던 낙동강 상류의 토계를 퇴계라 고친 것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후진을 양성한 삶의 궤적을 대변하고 있다.

1549년(명종 4)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주세봉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허락받고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고쳤다.

왕이 내려주는 현판을 받는 사액서원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이 내려졌다.

이황은 사림파의 학문 기반인 서원이 자리를 잡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풍기 군수를 그만둔 후에도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 하였다.

명종대에 드러난 이황의 명성은 선조대에 더욱 알려졌다.

1568년 이황은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여섯 항복으로 제시한 ,무진육조서(茂振六條蔬)>를

올리고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제왕학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황은 성리학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하여 당시 힉계의 주요 관심사이던 이기론에

대하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학문적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기이원론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인 사단(四端)은

'이(理0가 발(撥)하는 것이고, 희로애락 같은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는 것으로 보는

이기호발설(理氣互撥說)에 바탕을 두었다.

이황의 사상은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중국의 성리학을 완전히 소화하여 이를 보다

풍부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겼다는 점과, 개인의 수양과 절제를 강조하여 학자들의 도덕성을

우선에 두는 학문으로 발전시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조식은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형 토동(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건중(健仲),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남명(南冥)'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조식이 성리학 이외에

노장 사상에도 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서울 장의동 근처에서 살았으며, 30세에서 48세까지 처가인

경남 김해, 48세에서 61세까지 경남 합천에서 생활한 후 만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조식은 무엇보다 학문에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경(敬)과 의(義)를 요체로

삼았다.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한

것이다.

경의 상징으로는 성성자, (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는데,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고

새겨 놓았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그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실천 중시 사상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조식이 스스로에게 엄격했음은 '욕천(浴川)이라는 시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시구를 통하여

실천을 중시한 조식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식과 이황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당시에는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였고, 조식의 근거지 합천과 김해,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신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게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조식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갔다.

두 사람은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 생존하던 시절부터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도 이황과 조식을 영냠학파의 양대산맥으로 규정하면서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두 사람의 기질을 대비했다.

이황은 은거의 삶을 지향하면서도 학자가 출시하여 경륜을 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겼다.

조식은 자신의 시대를 모순의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곧 처사(處士)로 남았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는가 하면, 외손녀 사위

곽재우에게는 직접 병법을 가르쳤다.

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구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데에는 이황의

역할이 컸다.

이황을 일컬어 '동방의 주자'라 칭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서릿발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낸 조식과 성리학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완성하여 조선 중기

학문과 사상의 기틀을 잡아나간 학자 이황, 두 학자가 510여년 전 같은 해에 출생한 것은

조선시대 지성사에서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학풍과 현실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 중기 사상사의 큰 획을 그으면서

선비의 길과 학자의 길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기 퇴계학파는 남인, 남명학파는 북인이 되면서 정치적으로는 주로 야당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영남지역은 학문적 자존심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지성의 꽃을 피워나갔다.

조식과 이황이 다져놓은 학문과 지성의 뿌리가 어느 지역보다 튼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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