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5대조는 개국공신 조온 이며 감찰을 지낸 조원강과 여흥민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부친의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났다.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평안도 회천에 귀양와 있던 김광필에게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김광필은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를 거쳐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사림파의 핵심인물로서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되어 있었다.
조광조는 젊을 때 김광필에게 수학하여 성리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을 진기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광인, 화태(禍胎 . 화의 근원)라고 말할 정도였다.
관직에 나가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언제나 완벽한 자세로 임하던 조광조의 모습은 훗날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조광조는 용모와 안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는데,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번번이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이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고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는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2차 시험에 해당하는
문과 시험을 준비했다.
1515년 6월에는 천거로 조지서의 사지가 되었으며, 8월에는 문과 시험에서 을과로 합격하여
분격적으로 관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험에서 중종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책문을 던졌고,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을 핵심
요지로 하는 답안, 즉 대책(對策)을 냈다.
대책의 요지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정치에 임하면 인의예지의 도가 천하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법도를 정하고 기강을 세우려면 대신을 공경하고 그에게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재산권 강화를 주장한 정도전의 사상과도 맥이 통하는 논리였다.
대책문을 계기로 가능성만 있던 학자 조광조는 중종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된다.
조광조는 정치이념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하게 된다.
조광조 개혁정치의 핵심은 유교적 이상정치의 실현이었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의 교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무엇보다 신하의 입지를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연산군 시절 언론기관이 해체되고, 경연이 폐지당한 상황을 원래 위상대로 회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연산군 시대에 거의 폐지되었던 경연은 중종대에 이르면 아침의 조강, 점심의 주강,
저녁의 석강이 빠짐없이 거행되었으며, 심지어 밤에 하는 야대까지 열렸다.
조광조는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이념을 전파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곳으로 소격서를
지목하였다.
소격서는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으로 국가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중종은 선왕대부터 존속해온 소격서의 폐지를 매우 부담스러워했으나 조광조는 이를
실현시켰다.
소학과 향약의 보급에도 전력을 다해 사림파가 주도하는유교질서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삼강행실도> <이륜행실> <주자가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했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시험 대신에 현량과를 추진해,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영입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인물 중심으로 정치권의
물갈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김식, 김정, 박상, 김구, 기준 등 개혁파 사람들이 조광조의 지원군이 되었다.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했다.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지방특산물로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였으며 균전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집중을 완화하고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하여 부유층의 재산 확대를
막으려 하였다.
원칙과 양심에 입각한 조광조의 개혁정치 상당부분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노선을 취한 것은 기성 정치새력인 훈구파였다.
훈구세력을 자극한 것은 위훈삭제였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세력에게 준 훈작 중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하여
이를 박탈하자는 것이다.
공신인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해여 훈작을 받은 사람들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세력을 제거하고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의 반정공신은 120여 명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45명이나 인조반정 때의 공신
53명 숫자를 훨씬 뛰어넘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한때는 그를 2인자로 만들어준 점 때문에 중종과
조광조의 관개가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왕과 신하의 관계는 엄연히 추구하는 영역이 다르고 넘어서는 인 될 벽이 있다.
중종은 한때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를 발탁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중종이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 가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조광조는
동반자이기보다는 왕권에 도전하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중종과 조광조는 서로 추구하느 정치적 길이 달랐기에 어떠한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할 수 있는 '위험한 동반자'였다.
건국 초 정도전과 이방원이 피를 부르는 권력싸움을 전개한 것이나 세조의 왕위찬탈과
사육신 사건은 모두 왕권과 신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다.
중종이 조광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감지한 훈구세력은 왕실에 심어둔 정치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조광조는 왕권까지 넘보는 야심차고 위험한 인물임을 유포했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 일파의 동향을 중종에게 비방하도록하고,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새겨 궁중과 민심을 흉흉하게 했다.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1519년(중종14)11월 훈구세력은 밤에 경복궁 신무문을 통하여 궁궐에 잠입하여
중종을 만났다.
이 만남으로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 김식, 기준, 김구, 윤자임, 박세희 등은 숙청되었다.
이들은 '기묘사림'이라 칭한다.
이것이 조선의 4대 사화 중 세번째인 1519년의 기묘사화로서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좌초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519년 12월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한때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중종이 내린
사약을 마셨다.
38세라는 짧지만 굵은 생의 끝이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패배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백리 관료 이원익... (0) | 2014.08.25 |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 (0) | 2014.07.25 |
중인문화 ... (0) | 2014.06.28 |
조선의 왕릉 ... (0) | 2014.06.22 |
사화(士禍 )... (0) | 20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