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은 조선시대에도 금표를 세워 함부로 가지 못하게 한 그린벨트 지역이어서
지금도 주변의 수목이 울창하여 나들이 장소로 좋다.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 당대의 건축미와 미술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는 것도 왕릉 여행의 즐거움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뜻한다.
왕비의 경우 정비와 계비의 무덤을 모두 포함한다.
조선시대 왕의 자리에서 쫒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연산군 묘' , '광해군 묘'라
칭하여 조선시대적인 기준이 현재까지도 적용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종도 한때는 강등되어 '노산군 묘'로 칭해졌지만, 숙종대에 들어와 복권되면서 단종의
무덤은 '장릉'이 되었다.
왕의 사친으로서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한 경우에는 '원'이라고 칭하였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을 소령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무덤을 휘경원,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릉원이라한 것도 이런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경우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면서 현릉원도 승격되어 융릉으로 능호가
바뀌었다.
왕릉 조성에서 가장 크게 고려된 것은 풍수지리와 지역적 근접성이었다.
명당이면서도 서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으로 적합했다.
후대 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려면 한양과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조선 왕릉이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지만 주로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시 등
경기북부에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재 구리시 동구릉 경역은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이 조성된 이래로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계속 조성되어 동쪽에 있는 아홉개의 능이란 뜻으로 '동구릉'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왕릉의 조성 숫자에 따라 '동육릉', '동칠릉'이라 불렀다.
고양시에 조성되어 있는 서오릉, 서삼릉을 지칭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상대적으로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단종의 장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효종의 영릉, 정조의 건릉, 순조의 인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데
따르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왕릉은 왕이 죽기 전 미리 지정해놓고 그곳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든 무덤이 그대로
조성되지는 않았다.
왕릉을 만드는 주체인 후대 왕의 생각과 정치적 변수, 신하들의 의견 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는 풍수지리적인 측면 외에도 정치적인 역학관계, 정비와 계비의
갈등 등 다양한 변수가 큰 작용을 했다.
선왕에 대한 상례와 제례는 현왕이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의례였다.
따라서 왕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 조성에 왕조의 역량이 총집결 되었다.
그러나 첫 왕인 태조의 무덤은 왕비 없이 혼자 묻히는 불운을 맞이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 초기 태종과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갈등이 있었다.
태조는 조선 건국 후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지명했다.
태조의 첫 부인 신의왕후의 다섯번째 아들 방원은 이에 대해 격분했다.
급기야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형 정종을 왕으로 올린
다음 결국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의 즉위에 분노한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고,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태조와 태종 부자의 갈등은 컸다.
태조가 죽은 후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고민은 이어졌다.
조선 건국 전에 죽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은 개성에 있어서 태조의 무덤을 만들 수
없었고,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이 한양에 조성되어 있지만 그 옆에 아버지를
모셔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1396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경복궁에서도 잘 보이는 지금의 덕수궁근처에
왕릉을 만들고 정릉이라 하였다.
태조는 궁궐에서 정릉의 아침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정도로 계비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태종은 정릉이 빤히 보이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1408년 태조의 무덤으로 건원릉을 조성한 후 본격적으로 정릉을 파과하여 1049년(태종 9년)
정릉은 도성 밖 양주 지방, 형재 정릉(서울 성북구) 자리로 옮겼다.
태종은 원래 정릉의 정지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깍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
원래 정릉이 있던 자리는 현재에도 정동으로 부리면서 신덕왕후의 자취를 기억하게 한다.
결국 태조의 무덤 건원릉은 태종 때에 신의왕후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한 채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검안산 자락에 조성되었다.
건원릉에 특징적인 것은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함흥의 억새풀을 가져와 봉분을 덮어준 것이라고
한다.
생전에도 많은 갈등을 겪은 태조와 태종은 무덤마저도 아버지가 원치 않은 곳에 조성하였지만
아버지의 마자막 유언만은 거절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을 기준으로 보면 숙종은 행복한 왕이라 할 수 있고 중종은 불행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생전에 함께한 왕비 4명과 죽어서도 같은 경역 내에 묻혔고, 중종은 자신과 함께한
3명의 왕비 중 1명과도 함께하지 못하고 외롭게 홀로 묻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서오릉 경역 내에는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를 모신 명릉과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이 함께 조성돼 있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나란히 묻혀있고, 유언을 남기면서까지 숙종 곁에 묻히고 싶어한
인원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무덤 왼쪽의 언덕 높은 곳에 조금은 초라한 모슴으로
조성되어 두 사람을 질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한때는 숙종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은 장희빈에1969년 이곳으로 왔다.
1701년 사약을 받고 죽은 후268년 만이었다.
원래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에 거의 폐허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장희빈의 무덤이 발견되자 후세 사람들이 알아서 숙종 곁에 모시고 온것이다.
숙종과 반대로 생전에는 3명의 왕비와 있었지만 죽어서는 1명의 왕비와도 함께하지 못한
왕은 중종이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부왕인 성종의 경역 내에 조성된 중종의 정릉, 중종은
3명의 왕비를 두었건만 사후에 그를 지켜주는 왕비는 한명도 없다.
첫 왕비 단경왕후는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되는 바람에 사후에 함께할 수 없었다.
계비로 맞은 장경왕후 윤씨와는 서삼릉의 희릉에 함께 묻혀있었지만,나중에 갈라섰다.
중종 곁에 묻히고자한 문정왕후가 이미 중종의 무덤 옆을 지키던 장경왕후(인종의 생모)를
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종의 정릉은 명당이 아니었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려는 소망을 접고 현재의 태릉에 조성되었다.
중종은 왕비 3명 중 어느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버지 성종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영조의 무덤인 원릉에는 50년을 함께 산 조강지처 정성왕후가 아닌, 1759년 15새 나이로
66세인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가 묻혀있다.
영조의 두 왕비인 정성왕후와 정순왕후의 엇갈린 운명은 왕통의 무덤 자리에서 나타난다.
현재 서오릉 경내에 자리잡은 정성왕후의 홍릉은 시아버지인 속종과 4명의 시어머니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와 장희빈의 무덤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50년을 해로했건만 사후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정성왕후와, 51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남편 영조의 곁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정순왕후의 무덤, 이처럼 왕릉은 두 여인의
마지막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과 왕비에 얽힌 수많은 사연이 되살아나는 곳 조선 왕릉, 200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조선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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