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은 한 번 하는 것도 힘들다는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진기록을 새웠다.
이원익은 1547년 10월 24일 한양 유동 천달방(오늘날 동승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다.
그의 고조는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의 11남인 익녕군, 증조는 수천군으로 왕실의
종친이다.
함천군이 이원익의 부친이다.
모친은 동래 정씨로 감찰 정치의 딸이었다.
이원익의 부친은 종친이었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가, 4대가 지난 이원익에
이르러서 출시할 수 있었다.
이원익은 1564년 생원 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문과 시험을 준비했다.
1565년에는 정몽주의 7세손인 정추의 딸과 혼인했으며, 1569년(선조 2) 10월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 직책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이루어졌다.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가 되었을 때, 율곡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다.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정무를 맡겼다.
이후 이원익은 사간원 정언을 거쳐 지평, 형조정랑 등 중앙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1584년 이원익은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생활에서 벗어나 집상을 하였다.
당시 서울 낙산 밑에 집이 있었는데 여가만 있으면 거문고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자탄자영
하였다.
음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삼각산, 해인사, 금오산 등을 두루 유람했다.
부친상을 마친 이원익은 1587년(선조 20) 4월 안주목사가 되어 안주의 방어 제도를 개혁하여
4교대제이던 군역을 6교대제로 바꾸었다.
군역을 줄여 농민의 불편을 줄인 것이다.
1591년에는 7월 예조판서에 이어 8월 이조판서에 올랐다.1592년의 임진왜란은 이원익의
관료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왜적의 빠른 진격에 당황한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면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선조가 평양에 도착했을 당시 이원익은 평안도 도순찰사로 있으면서 전쟁 때의 이반된 민심
수습과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군량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왜군이 대동강까지 육박하는 상황이 되자 선조는 의주로 가는
피란길을 서둘렀다.
이원익은 "국왕은 사직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해야 합니다,비록 처지가 곤궁하고 또 명나라가
작은 나라의 왕실을 위한다고 하지만 명나라 땅으로 건너가서는 인 되며 건너가도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명나라로 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선조는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란을 했고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군이 참전했을 때 이원익은 뛰어난 한어(漢語) 실력을 선보이며 조선의 입장을 정확히
명나라에 전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원익은 영남지방에서 활약하면서 이순신과 인연을 맺었다.
한산도에서는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하였다.
이원익의 회고록에는
"이순신은 충용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유성룡이 그를 나라에 추천하였다,
... 원균이 한산도에 와서 크게 패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망해갔다.
이순신은 왕명을 받고 갔는데 적병이 또 크게 이르렀다.
이순신은 임기응변하여 신출귀몰한 비법을 쓰고 사졸들은 사력을 다하여 큰 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유탄을 맞았다.<오라선생문집> 부록 권1, <일사장>" 고 하여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 보인다.
1596년 11월 선조와 유두수, 유성룡, 이산해, 정탁 등 조정의 대신들이 모여 수군에 대한 대책을
논의 하는 과정에서도 이원익은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거나
"원균의 공은 이순신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하면서 원균을 두둔하는 이상해나 윤두수와 팽팽히
맞섰다.
이순신은 이원익의 후원에 대해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상국(相國.이원익)의 힘이었다"고 하거나
"내가 장수가 되어 밖에 있자 참소한 말들이 길을 메웠는데, 상국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주었으므로 오늘날 수군이 약간 완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고 바로 상국의
힘이었다"고 하여 이원익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1598년 7월 좌의정 이원익은 명나라로 가는 사신이 되었고, 귀국 후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광해군의 즉위와 더불어 북인 정권시대가 열렸다.
북인 중에서도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이 권력을 잡은 대북 정권이 수립되었지마느 이원익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당색에 기울지 않았고 내외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보여준 관료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그를 영의정에 오르게 한 요인이었다.
광해군 초반에 이원익은 공납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동법 추진을 주장했다.
토지 결수를 부과 기준으로 한 대동법은, 지주의 부담을 늘리는 반면 소농의 부담은 줄어들게
하여 백성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광해군 초반의 시기는 임해군의 처형과 영창대군 살해에 이어 인목대비의 유폐가 이어지는
'공안정국'이었다.
북인의 강경한 정치노선에 반대한 이원익은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1609년 8월 23차례의 사직서를 울린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우너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
이원익 만큼 경험 많은 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다시 경색 정국을 조성하자, 1612년 4월 네 번째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는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1615년 6월 홍천에 유배되었다.
2년여를 유배지에서 보낸 후에는 여주의 여강에 있는 양덕리에 거처하였다.초가 두어 칸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 집에 거처했고, 처자들은 하루걸러 끼니를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네 번의 영의정을 지낸 인물의 삶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수립된 후 이우너익은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첫 번째 영의정은 늘 남인 이원익이었다.
1625년 인조의 허락을 받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가면서 이원익을 도제찰사로
삼았다.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 이라며 이원익의 능력에 신뢰를 보였다.
8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국가에서 필요한 재상 이원익은 1634년 1월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금천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못했다."지 는 마지막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 삶을 살았던 이원익의 모습을 잘 증언해 준다.
현재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소재한 관감당(館感堂)은 이원익의 종택으로, 이원익의
청빈한 삶의 흔적을 접해 볼 수 있다.
이원익은 선조에서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국내외 난재들을
적극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해결해갔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 수원화성행차 ... (0) | 2015.01.13 |
---|---|
조선 왕릉 현황 ... (0) | 2014.12.29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 (0) | 2014.07.25 |
사림파의 선두주자 조광조 ... (0) | 2014.07.06 |
중인문화 ... (0) | 2014.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