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설날에 대해...

에 스더 2012. 1. 26. 21:52

 까치의 설날은 왜 어저께일까?

까치의 무늬와 비슷한 색동저고리를 설 전날에 준비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일제 강점기에 양력으로 신정을 쇠는 일본 설을 까치에 비유해서 우리민족의 진짜 설은

오늘이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국어학자 고 서정범 교수의 설이다.

옛날에는 작은설(설전날)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불렀다.

'아치'는 작다(小)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아치'라는 뜻이 사라지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기도 지방에서만 '까치설'이라고 했으나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한 윤극영 선생 덕분에 전국적으로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전에는 설을 '설 명절'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정월 초하루 단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설이란 용어 자체는 정월 초하룻날, 하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실제 명절은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음력 1월 1일부터 15일까지의 기간을 통틀어 '설 명절'이라고 불렀다.

설 명절이 중요한 이유는 음력에서 한 해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이다.

 

 설날에는 원래 세뱃돈을 안 주었다고?

중국 사람들은 설날이 되면 결혼하지 않은 자식에게만 붉은색 봉투에 약간의 돈을 넣어준다.

중국인에게는 붉은색이 행운의 색이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을 담아 새해 첫출발을

응원했다.

베트남에도 이 같은 풍습이 전해져 빨간 봉투에 신권으로 소액의 지폐를 넣어주는 '리시'라는

관습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세배를 받지 않는다.

일본은 1960년대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세배 풍습이 전해졌고 역시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주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배하러 온 아이들에게 돈 대신 떡이나 과일 등 먹을

것을 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우리 조상은 세뱃돈을 줄 때

봉투에 넣어 주되 겉봉투에 반드시 '책값 , 붓값 하고 어디에 써야 하는지 가르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뱃돈은 왜 복주머니에 담을까?

조선시대 궁중에는 음력 정월 첫 상자일에 볶은 콩 한 알씩을 붉은 종이에 싸서 넣은 주머니를

종친들에게 보내주던 풍습이 있었다.

쥐날에 주머니를 차면 그해 일년 내내 귀신이 물러가고 만복이 온다고 믿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설날에 새해맞이 선물로 친척이나 자손들에게 복주머니를 나누어주는 풍습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전통 한복에는 물건을 넣을 수 있는 호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녀야 했으므로 세뱃돈을 받으면 복주머니 속에 넣었던 것이다.

 

 떡국은 왜 가래떡으로 끓일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설날에는 맑은 물에 흰색 떡을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다.순백의

떡과 국물로 지난해의 묵은 때를 버리고 하얗고 뽀얗게 새로 태어나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떡국은 3세기 이전 떡이 주식이던 상고시대부터

전해진다.

멥쌀을 떡메로 친 가래떡은 예전부터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시루에 찐 떡을 길게 늘여 뽑는 이유는 재산이 쭉쭉 늘어나라는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고

가래떡을 썰어놓은 둥근 모양은 마치 엽전 같아서 새해에 재화가 풍족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우리 조상은 하얀색 떡국으로 경건한 한 해를 권하며 동시에 재복도 빌었던 것이다.

개성지방에서는 독특하게도 조랭이 떡국을 먹었다.

조랭이떡은 어린아이들의 옷끈에 나쁜 액을 쫓기 위해 달아주었던 나무조롱을 닮은 떡을

말한다.

조랭이 떡국을 먹으면 새해의 나쁜 액을 모두 막아준다고 믿었다.

 

 복조리를 왜 해마다 새로 사야 할까?

1925년 발간된 해동죽지에는 "예로부터 삳달 그믐날의 해가 저물면 복조리 파는 소리가 성

안에 가득하다.

집집마다 사들여서 붉은 실로 매어 벽에 걸어둔다"는 기록이 나온다.

새해 첫날 새벽에 복조리를 사는 풍습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세시풍습의 하나였다.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자정 이후부터 정월 초하루 아침 사이에 구입하는데 조리장수가 오면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쓸 만큼의 조리를 구입해 'ㅅ'자 형으로 묶은 뒤 방 귀퉁이나

부엌에 돈과 엿을 넣어 매달아두었다.

조리로 쌀을 일듯이 한 해의 복을 일어주고 재앙을 걸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풍속이 생겼다.

복조리 외에 복갈퀴도 흩어져 있는 복을 모은다고 해서 소중하게 생각했다.

새해 들어 처음 사는 갈퀴를 복갈퀴라고 했는데 경상도에서는 정월 첫 장이 열리는 날

복갈퀴를 샀고 전라도에서는 정월이나 2월 중에 샀다.아이들은 복조리를 이웃집 마당에

던져두고 세배도 할 겸 조리 값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용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 조리 값은 절대 깍지도 무를 수도

없었다.

복을 깍고 복을 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리나 갈퀴를 다 쓰면 귀신이 복을 가지고 나가지 않도록 불에 태워야 한다.

 

 섣달 그믐날에는 왜 신발을 들여놓고 잤을까?

섣달 그믐날 밤에는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고 잠자리에 드는 풍습이 있었다.우리나라 전통

귀신인 '야광귀'를 쫓기 위해서다.

야광귀는 야괭이,야광이,앙괭이 등으로 불리는데 충북 음성에서는 '달귀귀신'이라고 하며,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는 '야귀할멈'이라고 한다.

야광귀는 섣달 그믐날 밤이면 인가에 찾아와 아이들의 신발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딱 맞는 게

있으면 신고 가버린다고 한다.

이때 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일 년 운수가 사납다고 믿었다.

우리 조상은 야광귀가 오지 못하게 집 안의 문틈을 막고, 옷을 한곳에 샇아두고, 귀신이

싫어하는 밝은 색을 물들인 색동옷을 준비했다.

그리고 저녁이면 마당에서 머리카락을 태우고, 장대에 체를 걸어놓으며'야광귀 쫓기'를

했다.

야광귀는 숫자 세기를 좋아하는데 머리가 좋은편이 아니라서 조금 세다가 까먹고는 다시

처음부터 세는 습성이 있다.

체를 걸어놓으면 머리가 나쁜 야광귀가 와서 밤새 체의 구멍을 세어보다가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기겁을 하고 도망치기 마련이다.

 

 덕담을 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덕담은 예로부터 '이렇게 되라'는 미래형보다는 '그렇게 되었다지'하는 과거형을 썼다고

한다.

상대방의 새해 소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새해엔 아들을 낳았다지'라거나 '올해는

과거에 급제했다지'라고 표현하곤 했다.

상대방의 희망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덕담을 해주어야 언령을 받아 실재로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새해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예측해 설계하고 성취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말이

덕담이다.

하지만 '새해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는 훈계형 덕담이나 '올해에는 결혼했다지' 혹은

올해는 취업했다지'라는 부담형 덕담은 듣는 이에 따라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요즘에는 아랫사람이 세배를 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어른이 세배를 받고 덕담을 하시면'명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라고 상황에 맞게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 좋다. 

올해엔 하는 일마다 대박이 났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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