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이란 단어를 모르는 언제나 청춘인 그는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고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다.
지독히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
그는 어린시절 전북 임실에서 더 들어간 산골 마을 청웅에서 태어났다.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형제는 모두 8남매나 되었다.
위의 형과 누나 넷은 국민학교에 발도 붙여보지 못한채 열심히 일만했다.
아버지는 머슴으로 일하셨고 남은 가족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태영이는 영리하니까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집안에서 한사람 정도는 까막눈을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권고를 들은 부모님은 마치 해외 유학이나 보내듯이 큰 맘 먹고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외에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해오는 일이
전부였다.
하루 세끼 먹는다는것은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거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국민학교 5학년 되던해에 가난한 산골 마을에 조그만 교회가 들어섰다.
초가집을 빌려서 시작한 교회,그곳은 가난에 찌든 소년의 유일한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어린나이였지만 새벽기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첩첩산중이라서 깜깜한 새벽이면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이겨냈다.
이때부터 새벽기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배움의 열정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학교 를 독학으로 가정교사로 취직해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무작정 상경해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두를 닦으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성경과 찬송가를 챙겨들고 교회로 달려갔다.
새벽에 드리는 기도는 오로지"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전부였다.
도무지 기능성이라곤 없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덕분에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감사했던 것이다.
유학의 꿈을 그리며 삶을 지탱해준 좌우명이 성경말씀 (빌 4:13)이다.
구두닦이 청년이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 (빌 3:13~14, 행 2:17)을 좋아했다.
덴마크 국왕(프레드릭 9세)에게 무작정 편지 한통을 보낸지 약40일쯤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된 편지를 받고 1968년
꿈에그리던 유학을 실현 시켰다.
장학생으로 Nordic Agricultural College를 다녔고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대학원에서 농업 경제를 전공하여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을 도입하는 역사를 써 간
장본인이다.
1971년 건국대학교 교수시절.
그의 농촌운동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청화대 비서실 새마을 담당으로 발탁되어
3년동안 일했다.
불가능으로 점철된 환경이었지만 그것은 원망의 대상이 될수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맞서서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할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긍정적인 마음 가짐과 태도로 도전한 결과 꿈을 구체화
시켜 이룰 수 있었다.
건국대학교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70세가 넘었지만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
발전을 위해 농촌 청소년 미래재단을 설립해 청소년 지도자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다.
저서로 <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꿈과 믿음이 미래를 결정한다>
<천재를 만드는 유태인의 가정교육법> <지혜의 샘, 탈무드에서 배우는 자녀교육법>
등이 있다.
히브리대학 석사, 박사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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