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라도 살라
하루 평균 33명이 스스로 세상과 작별한다.
어떤 충격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포기할까?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결국 그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다.
이 소설이 유럽을 강타한 18세기 후반,
베르테르의 자살에 공감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삶을 마감했다.
성경에 에스겔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선지자였다.
자신의 조국에 장차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울부짖었다.
민족을 깨워야하는 의무가있는 에스겔은 희망이 보이지않는
암담한 현실앞에 얼핏 죽음을 떠올렸으리라.
하나님은 피투성이 인생을 향해 두번 연속 명령하셨다.
"피투성이라도 살라. 피투성이라도 살라."(에스겔16장6절)
삶은 의무다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포기할 권리는 없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해결의 길이 열린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죄악이다.
복음은 감사와 소망을 갖게 한다. 복음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희망의 초원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남들보다 굳세게 살아야 한다.
욥, 요셉, 다윗을 보라.억울함괴 시련 상상을 초월한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그러나
피투성이의 몸으로도 희망을 노래하며 최후에 승리하지 않았는가.
반면에 유다, 사울왕은 스스로 일생을 마감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회개할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리고만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영혼들을 향해 아타까운 눈빛으로 말씀하신다.
"피투성이라도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