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중인문화 ...

에 스더 2014. 6. 28. 15:38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북촌이라 칭한 것과 짝하여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사이

종로구 옥인동 일대를 서촌이라 한다.

조선시대 서촌은 중인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다.

중인들의 문학운동인 위항문학운동이 전개된 곳이었고, 현재에도 인왕산 일대에서

필운대, 송석원, 수성동 계곡 등 중인문화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던 계층, 중인.

조선시대에는 주로 시굴직에 종사한 역관, 율관이나 양반의 소생이지만 첩의 아들인 서얼,

중앙관청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 등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불렀다.

양반은 아니면서 상민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던 중간층의 신분이다.

중인 가운데 역관이나 의관, 율관은 오늘날 외교관, 의사, 변호사에 해당하므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주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분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이들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를 떠돌았다.

중인의 명칭 유래에 관하여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대개 중인의 무리는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는 <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반이나 상민 어디에도 속하지 않던 '중간적 신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인은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신분상승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역관, 의관 등 부를 축적한 중인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서얼들의 사회의식도 성장했기

때문이다.

중인층의 신분상승운동은 체제를 바꾸는 것보다는 양반층을 모델로 하여 자신들도

양반처럼 살아가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지금의 문학동호회쯤 되는 시사를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시와

문장을 발표하는 것 ,즉 문학운동이었다.

중인들은 인왕산 아래 옥계천이 흐르는 곳에 주로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사 활동은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인왕산은 대대로 경치가 좋은 명승지로 손꼽혀왔고, 그 자락에는 한양의 5대 명승지인

인왕동과 백운동이 있었다.

경복궁과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해서 이곳에는 예부터 양반과 중인들이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을 지으면 안 되지만 임진왜란 중 경복궁이 타버려 서리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든 것이다.

 

중인들의 문학을 일컫는 용어는 '위항문학'이다.

'위항'이란 누추한 거리를 뜻하는 말로 중인층 이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뜻하였지만,

대체로 중인들의 문학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시사가 옥계시사(송석원 시사라고도 함)였다.

옥계는 옥류천 계곡이라는 뜻이며, 송석원은 중인층이 모이는 중심 언덕이었다.

지금도 인왕산 아래 동네를 옥인동이라 하는 것은 옥류천과 인왕산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중인들의 시사 활동은 단순히 시를 읊조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사 활동을 하면서 공동 시문집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1712년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를 시작으로 60년을 주기로 편찬한 책인

<소대풍요>,<풍요속선>, <풍요삼선>으로 이어졌다.

1791년에는  옥계시사 동인들의 시와 옥게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옥계사시첩>을

만들기도 했다.

중인들은 시문집 발간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 못지않은 학문적 수준이

있음을 널리 과시하였다.

60년마다 공동시집을 내고자 한 약속을 120년간 지킨 것에서 이들의 공동의식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계시사의 주된 활동무대 중 한 곳이던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고안에 위치하고 있다.

필운대는 원래 명장 권율이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

필운대에는 이항복이 새겼다는 '필운대'라는 석 자가 바위에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1873년(고종 10)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이 찾아와 이항복을 생각하며 쓴 한시가

남아 있다.

 

<이향견문록>은 19세기 학자 유재건이 1862년에 편찬한 책이다.

이향이란 '백성들이 사는 동네"를, '견문록'은 '보고들은 기록'을 뜻하므로 곧 이곳저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란 뜻이다.

양반 사대부와 같이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고 중인, 상민, 천민, 노예, 신선,

도사, 점쟁이, 여자, 스님 등 다양한 신분층의 인물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신분이 낮은 기생, 천민들의 행적까지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그래서인지 천민 출신 유희경에 대한 기사까지 잘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를 가장 자세히 기록한 책이 바로 <이항견문록>이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에 헌신한 모습은 <이항견문록>을 통해 살아난 것이다.

 

기술직 중인, 관청 서리, 지방 향리와 함께 중인의 다른 한 축을 형성한 신분이 양반 첩의

자손인 서얼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서얼들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신분사회의 장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서얼들은 보통의 양반처럼 주요 관직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통청(홍문관의 벼슬아치가

될 자격을 얻는 것)운동을 전개하고, 정조 때 서얼의 관직 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허통절목이

만들어졌다.

서얼들의 노력이 일부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서얼들의 전기 <규사>에서도 확인된다.

해바라기를 뜻하는 '규'자를 넣어 해를 향한 해바라기처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변함없음을

약속한 서얼들의 전기 <규사>는 이제 서얼도 역사의 당당한 주인공임을 공포한 기록이었다.

지방의 향리들도 자신의 가문을 정리한 기록을 남겼다.

경주(월성) 이씨 향리 가문인 이진흥이 쓴 <연조귀감>, 당당하게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세상에

공개하겠다는 자신감이 잘 나타나 았다.

<연조귀감>은 상주의 경주 이씨 향리 가문 5대에 걸쳐 쓰였다는 점이 특히 돋보인다.

특히 인왕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가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필운대>

<수성동> <인곡유거> 등18세기 이 지역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 중인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인왕산 일대 서촌 지역 중인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양반가를 대표하는 북촌 지역이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신분 차별의

벽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