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사화(士禍 )...

에 스더 2014. 6. 3. 22:40

    조선을 핏빛으로 물들인 사(士 선비 )화 (禍 재앙 ),

    그 시작은 사초 였다.

    (史 역사 草 풀 : 실록의 자료가 되는 기록)

 

    사화란 조선의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당한 사건을

    뜻한다.

    무호사화와 갑자사화는 연산군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대표주자임을 방증하고 있다.

 

 4대 사화 (조선 전기 중요한 사건 네 가지) ... 

 

▶ 무호사화 (1498년 연산군 4년)

    무호사화는 정치적으로 서로 견제하던 사림파와 훈구파의 격렬한 대립으로 발생.

    연산군 즉위 후 균형깨져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조의제문' 빌미로...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패왕 항우가 어린 조카 의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실을

    비판한 글이다.

    실제적으로는 항우를 수양대군에,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을 겨냥한 글이었다.

    유자광이 사화의 주모자가 된데는 김종직과의 악연도 큰 작용을 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 시절  유자광이 쓴 현판을 불태워버리도록 지시를 했다.

    예종 때 남이의 역모사건을 고변한 유자광을 간신의 전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김일손, 권오복 등 능지처참 사림파 숙청했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무담의 관을 꺼내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를

    가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과 친필 현판들을 찾아 남김없이 없애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20년 전에 당한 모욕을 철저한 복수로 앙갚음한 셈이다.

 

▶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10년)

    성종의 장남인 연산군의 이름은 융이다.

    장남으로서 왕위 계승했다는 정통성은 큰 힘이 되었다.

    사실 조선은 왕위 계승에 있어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했지만 27명의

    왕 중 7명만이 장자로 왕이 될 만큼 왕위 게승에 변수가 많았다.

    문종이나 단종처럼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 재위가간이 짧거나 폐위되는

    등, 적장자의 불운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연산군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오히려 폭정을 가속했다.

    갑자사화로 말미암아 세조에서 성종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훈수파를 비롯해

    사림파의 씨를 말릴 정도로 대규모의 정치적 살육이 전개됐다.

    연산군의 생모를 폐비시켜 죽음에 이르게한 사람들에 대한 공적인 복수극으로서,

    사림파는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사건 관련, 대신, 사림파 등 색출 제거했다.

    한명회도 부관참시했다.

    재위 12년간 2번의 사화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 가차없이 피의 보복 '독재 가속화'

    윤씨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으로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479년 폐위 한후 1482년 사약까지 내렸다.

    윤필상 등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당시 연산군 나이 7세였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임사홍이 폐비의 죽음에 개입한 신하들이 조정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고, 임사홍에 의해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서 성종의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을 비롯한 많은 대신과 사림파 학자들까지 희생되었다. 

    희대의 풍운아 한명회마저 부관참시라는 최악의 형벌을 당했다.

    연산군은 전국 팔도에서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찾아내어 궁궐의 기녀로

    차출했다.

    채홍사들이 기녀들의 선발에 나섰고 이때 뽑힌 기녀들은 운평, 가흥청, 흥청 

    등으로 불렀다.

    연산군이 흥청과 같은 기생들을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 망청' 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연산군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흥청 망청 이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는 것에서 역사의 잘못을

    경계하는 의식은 수백년을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06년 창덕궁에 머물던 연산군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측이 된

    반정군에 의해 쫒겨났다.

    조선을 사치와 향락의 왕국으로 만든 그였지만 분노에 찬 반정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를 방어해줄 수 있는 측근하나 없는 외로운 퇴출이었다.

    왕위에서 쫒겨난 지 두달 만에 유배지 교동도에서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역사는 그를 최고의 독재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에 기름을 부운 여인은 기생출신에서 일약 후궁 지위에 오른

    장녹수다.

    권력을 조정한 연산군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길거리에서 돌 세례를 받으며 성난 군중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한순간의 권력과 부귀를 마감했다.

 

▶ 기묘사화 (1519년 중종 14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급진적 개혁정치를 정지시키기 위해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것을 이용해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주爲王)을 썼고, 벌래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주초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씨가 왕이 된다'

    뜻이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냈다.

 

▶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는인종의 외척과 명종의 외척이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사화로,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을사사화는 2년 뒤 정미(丁未)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으며,

    이 사화의 여파는 6년에 걸쳐 계속됐다.

    또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했다.

 

 

 훈구파 ...

     조선 초기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관료집단을 이르며,

     관학파라고도 한다.

     왕권 강화를 추진한 성종에 의해 등용된 사림 세력의 도전을 받으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립 국면을 조래하였고, 그 결과 조선 중기 사화가 발생했다.

     정인지, 신숙주,최항, 강희맹 등이여기에 속한다.

 

 사림파 ...

     사림(士林)은 본래 고려 말부터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 사대부 가운데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 말기 유학자 길재의 학풍을 이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광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등용한 것을 계기로 중앙정계로

     진출했다.